[Digital Camera Magazine 2008.08.20]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사진을 만나다




사진 속의 작은 꽃이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편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가 활짝 웃었다가 이내 바람에 흔들려 향기를 퍼뜨린다.
김정명(62) 작가의 야생화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밭에 와있거나 꽃과 자신만이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벅찬 감동이 전해진다. 들녘에 핀 야생화에 반해 꽃을 전문적으로 촬영한 지 어느덧 20여년, 이제 눈을 감으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가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대한민국 야생화 사진의 대부 김정명 작가를 만났다.



김정명 (김진형 작가 촬영) 1946년생, 15살 때부터 카메라에 빠진 후 지금까지 한국의 자연, 전통 등을 주제로 사진을 찍고 있다. 1995년부터 <한국의 야생화>, <꽃의 신비>를 발행하고 있고, 현재 한국식물사진가협회장을 맡고 있다.





중2 시골소년, 카메라에 반하다


“거제도가 고향인데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어요. 경상도 사투리도 심하고 낯설기도 하고… 특별한 재미없이 1학년을 보냈는데 2학년 봄소풍 때 친구가 카메라를 가져온 겁니다. 그게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친구에게 카메라를 억지로 빼앗아 그때부터 신나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정명 작가와 카메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15살 때부터 카메라와 함께 동고동락을 했으니 어느덧 약 5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한 셈이다.

“친구 카메라로 여름방학 내내 사진을 찍었어요. 당시 동네에 있던 사진관에서 청소를 해주면서 방학 동안 현상과 인화, 노출 등을 배웠지요. 그런데 개학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카메라를 돌려주게 됐는데, 그 후로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습니다.” 까까머리 중학생 김정명이 갑자기 기운이 없으니 그의 누나가 그 이유를 물어봤고, 원인이‘카메라’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뜻 카메라를 사주셨다.

“제가 3녀 1남 중 막내입니다. 위로 누나만 셋이었으니 집에서는 무척 귀한 아들이었죠. 누나들은 학교도 안보낼 정도였는데 저는 중학교 때 서울로 학교를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제가 카메라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하니 아버지가 카메라를 당장 사주신 거죠.” 그때부터 김작가는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당시 서울의 모습도 전부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필름과 현상, 인화에 드는 비용은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께 도움을 받았다. “옛날 풍물, 풍속사진 그리고 1950년대의 서울 시가지 사진은 다 있다고 봐도 무방해요. 카메라는 제 분신과도 같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실제 김작가가 보여준 슬라이드 필름 속에는 예전 서울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네거티브 필름이 아닌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네거티브는 보존기간이 짧잖아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라이드로만 사진을 찍었죠. 당시 국내에서는 현상을 할 수 없어 미국까지 필름을 보내 현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작가는 70년대부터 동영상을 촬영했다. 영화필름으로 당시 모습을 촬영해 지금 풀HD 자료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만한 화질의 다양한 자료를 잔뜩 가지고 있다. 영상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미리 읽은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은방울꽃과의 만남

유독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것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김작가는 젊은 시절 주로 자연과 한국의 멋, 전통 등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전국 산이란 산은 다 다녔고, 1983년에는 돌연 광주로 내려가 3년 동안 살면서 굿과 판소리, 당산제, 풍어제 등 전통문화에 대한 것들을 습득했다. 그 결과 설악산의 사계를 찍은 작품은 대한민국 문화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한 주간지에는‘한국의 얼을 찾아서’란 주제로 연재를 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야생화는 아주 운명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기억이 선합니다. 86년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도 산에 오르고 있었어요. 그러다 힘이 들어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아 쉬고 있는데 그때 아주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예뻐서 그 꽃 가까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핑’돌면서 어지럽더군요. 알고 보니 꽃향기가 독해 향에 취한 것이었어요.” 그 꽃이 바로‘은방울꽃’이었다. 작은 꽃들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서 향기가 진한 법인데 김작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그때서야‘우리 꽃을 너무 모르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김작가는 꽃에 대해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 산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야생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짐이 너무 무겁고 힘들기 때문에 주위를 볼여유가 없거든요. 그러다가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귀가 트이는데 그러면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그 후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햇빛과 나뭇잎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마지막으로 발 밑에 있는 야생화를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산에 올랐지만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몰랐기 때문에 꽃이 보이지 않았다는 김작가는 그 후로 꽃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수많은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해 일일이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외우고 꽃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런데 꽃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졌고, 자료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우리꽃들이 너무 많았다.


“복주머니난을 찍고 있는데 어떤 녀석은 꽃잎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고, 어떤 녀석은 꽃잎이 닫혀있는 겁니다. 같은 꽃인데 왜 다른지 궁금했죠. 궁금증에 대한 열쇠는 바로 꽃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꽃과 함께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까지 산에서 노숙을 하면서 지켜보니 꽃이 스스로 답을 알려주더군요.” 알고 보니 꽃가루받이가 끝난 꽃들은 더 이상 나비와 벌 등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 스스로 꽃잎을 닫는 것이었다. 김작가는 이른 봄, 쌓인 눈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와 앉은부채, 얼레지 등은 어떻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궁금해 온도계를 직접 가지고 다니며 외부 온도와 꽃 잎 속의 온도를 직접 재보기도 했다. 외부 온도는 영하 1.2도, 하지만 꽃술 속의 온도는 영상 11도였다. 김작가는 이를 통해‘꽃 밖은 아직 겨울이지만 꽃 안은 이미 봄’이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직접 체험하고 꽃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김작가는 단지‘야생화를 찍는 사진작가’가 아닌 야생화에 대한 생태적 특성까지 모두 마스터한‘진정한 야생화 사진작가’반열에 올랐다. 이런 김작가의 모습에 꽃들도 감동했는지 그 모습을 꽁꽁 감추고 있던 동강할미꽃과 지금은 멸종된‘노랑할미꽃’처럼 희귀한 꽃들이 김작가 앞에서만 얼굴을 드러냈다. 특히 지난 98년 강원도 정선에서 발견한 동강할미꽃은 다른 할미꽃들이 고개를 숙이고 피는 것에 비해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운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표해 2000년 학계에서 정식으로 명칭을 부여 받았으며 지금은 동강할미꽃 축제까지 열리고 있다.





백두산에서 독도까지


 김작가는 우리나라 구석구석의 자연과 꽃을 담기 위해 20년 가까이 해마다 백두산과 독도를 찾고 있다. 매년 다른 풍광과 만나기 위해 가는 시기는 조금씩 다르다. “이번에 백두산을 갔다 온 것까지 하면 17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 백두산에 있었네요. 1년에 많게는 2~3번 갈때도 있고요. 특히 백두산에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170여 가지의 북방계 식물이 있고 야생화 군락이 많아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은 천지 주변에서 야영을 할 수 없지만 90년대에는 야영을 하고, 절벽을 오르며 백두산 야생화와 천지의 모습을 담았다. 특히 한 번은 절벽 끝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와 죽을 뻔한 일까지 있었다.

“절벽에서 피는 꽃들은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더 화려하고 예쁩니다. 당연히 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그래서 폭이 50cm 밖에 안 되는 능선을 타고 내려가며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작가는 백두산만이 아니라 독도와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87년, KBS 촬영팀과 함께 처음으로 독도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독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그래서 울릉도에 도착하자마자 군청으로 가서 독도에 대한 자료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김작가는 독도의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연섬은 물과 나무,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벌거벗은 독도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 중요성을 알게 됐다. 물은 나고, 사람은 갈 수 있으니 나무 심는 게 가장 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푸른 독도 가꾸기’모임을 만들고 당시 내무부의 허가를 받아 5개 년 계획을 세워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개불나무와 동백나무를 심었다. 그 결과 지금 독도에는 엄연히 나무가 존재하며 꽤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김작가는 비무장지대에서도 사진을 찍고 있으며, 산과 아름다운 섬들을 한눈에 담기 위해 항공사진까지 담고 있다. 지난 84년부터 헬기나 경비행기를 빌려 찍은 김작가의 사진에는 굽이굽이 꺾어진 산과 계곡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투자를 안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투자하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올해 이미 백두산은 다녀왔으니, 이제 곧 독도에 갈 것이라는 김작가의 말에서 우리 자연과 꽃, 사진에 대한 진한 사랑이 느껴졌다.





여전히 식지 않는 열정


지금까지 김작가가 촬영해 온 야생화 사진은 필름으로는 약 60만장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약15만장이나 된다. 방대한 양의 사진들은 김작가의 손을 거쳐 엄선돼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해로 14호가 발행된 <한국의 야생화> 달력과 지난해 발표한 야생화 다큐멘터리 화보집인 <꽃의신비>다.

<한국의 야생화>는 지난 1995년을 시작으로 매년 하나의 주제를 정해 발행되고 있다. 지금까지‘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2002)’, ‘한국의 야생난초(2005)’, ‘잃어버린 우리 식물들(2006)’등을 발표했으며 올해는 ‘꿈속의 꽃’이란 주제를 정해 포그렌즈로(Fog lens)로 아름다운 꽃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담아낸 사진들을 수록했다. 그리고 내년에는 ‘꽃가루받이의 신비’라는 새 주제를 준비하고 있다.

“약 5년 전부터 주제를 정해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준비를 해야만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야생화>가 달력 형태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매일 꽃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라면, <꽃의 신비>는 다양한 꽃의 모습과 생태를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다. 봄, 여름, 가을로 3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크기가 가로 42cm, 세로 29.7cm, 총무게 14kg이나 된다. 금고 속에 보관해뒀던 필름들을 딸이 발견하고 이런 귀한 사진들은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는 설득을 받고 고민 끝에 내놓은 역작이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잘 찍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좋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진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사진을 볼 때의 감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죠. 그래서 발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딸과 지인의 설득으로 책을 내게 된 겁니다.”

한편 김작가는 식물생태 관찰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으며, 해외로 눈을 돌려 이 땅에서 잃어버린 우리꽃을 찾아 다니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에 갑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식물들을 다시 추적하고 있죠.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는‘미스킴 라일락’이나‘홍도비비추’는 우리가 무관심했던 사이 외국에서 그 진가를 알고 가져가 개량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김작가는 특히 일제시대 때 일본 식물학자가 처음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붙인 식물이 많다며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 한국 특산식물인 금강초롱에는 하나부사야 나카이(Hanabusaya Nakai)라는 일본 식물학자의 이름을 딴‘Hanabusaya asiatica Nakai’라는 학명이 붙어있다. 김작가의 대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3월 11일에는 사단법인 ‘한국식물사진가협회’를 창립해 우리 식물을 바로 알리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오는 10월 ‘전국식물사진대전’을 개최할 계획입니다. 이미 홈페이지와 포스터까지 준비가 됐습니다. 입상한 사진들로 사진집도 만들고 사진전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제는 그동안 찍어온 방대한 양의 사진들을‘정리’하고, 우리꽃을 알리는데 더 힘쓸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김작가는 사실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산과 들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게 더 좋다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앞으로는 컬러가 아닌‘흑백’으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싶습니다. 컬러가 꽃의 화려한 색과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주긴 하지만 흑백은 은은한 맛이 있어 흑백만이 가진 매력이 있거든요. 벌써 작업 중입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세월,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김작가의 열정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야생화를 찾아 촬영을 나설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는 김작가의 눈빛은 중학교 2학년 때 카메라를 처음 만난 순간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